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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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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1-23 12:04 조회4,6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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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샘이 터지듯 봄눈이 내렸습니다.
풀의 전생까지 적실만큼 내렸습니다.
갈한 목을 축이며 강골로 서 있는 나무들도
깡마른 부름켜 속의 숙근초도 발가락을 꼼지락거립니다.

커다란 쉼표로 찍히던 눈이 멎자,
개미 등을 짓누르는 구름도 걷히고,
홀맺힌 물소리도 풀렸습니다.
떠나간 풀씨와 꽃씨들이 되돌아오고,
균질의 상태로 햇살을 앓고 있는 목초지에도
작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엄마가 햇볕 따러 나간 사이,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갓난 아기의 얼굴에 꼬물거리면
아기는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못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아버리곤 할 것만 같은 조마로움도
못내 떨치지 못합니다.

쫑알거리며 따라다니는 강아지 꼬리 같은 버들개지를
손톱으로 긁으며 어디쯤 봄이 오는지를 가늠해 봅니다.
목질부에 연둣빛이 예릿하게 드러나지만
봄은 자드락을 타는 팔순 노모의 발걸음처럼
조금은 한스럽게 조금은 애통하게 그렇게 오고 있습니다.

종소리가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가지에
참새 부리만한 새순이 돋아나고
풀잎들이 하늘하늘 하늘 그리기를 하려고
날마다 채도를 높입니다.
박우물에 고인 하늘이 황사로 흐릿해져도
민들레 제비꽃 황새냉이를 앞세우고 봄은 오나봅니다.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샌 진찐한 그리움 같은 게
눈가에 얼핏 꽃물로 번집니다.
박새가 목청을 돋궈 욕지기를 해대는 산문
소맷돌 사이에 몸을 숨긴 제비꽃.
한낮에 담아놓았던 하늘이 쏟아질까봐
밤이면 봉오리 짓는 제비꽃.

미처 건네 주지 못한 숱한 사연과 온기들을
나이테 속에 끼워 두고
입을 다문 키조개처럼 세월을 헤저어 왔을
제비꽃을 보며
언제나 나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기를,
그러나 내 스스로 그런 한계를 만들지 않기를.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남은 생을 투자하여 정열을 다 할것.
타인에겐 하잘것없는 이 작은 소망이 내게 욕심이라면,
정말 욕심이라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떠남과 만남 사이에 푸른 잎을 흔들며 기다리는
나무가 되어라고 해도 좋습니다.
돌 속에 천년 비원을 안은 신라인 돼라 해도 좋습니다.
한사람의 작품 속
한사람의 눈동자 속 눈부처가 되고싶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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